여기 흥미로운 그림이 하나 있다. 회색으로 표시된 영역은 독일이다. 하얀색 경계선은 16개 연방주의 경계선을 나타낸다. 수십 개의 녹색 풍선은 특정 병원을 표시한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녹색 풍선이 주로 독일 외곽에, 각 연방주의 외곽에, 심지어 섬지역에도 분포된 것을 알 수 있다.
왜 이 병원들은 접근성이 좋은 도시에서 멀리 벗어나 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재활병원이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며 재활하도록 마련된 시설이기 때문이다. 녹색 풍선이 표시하는 재활병원은 다름 아닌 아동·청소년 전문 재활병원이다.
독일에 아동·청소년 전문 재활병원이 많은 이유
아동·청소년재활연맹(Bündnis Kinder- und Jugendreha)에 따르면, 현재 독일에는 아동·청소년 전문 재활병원이 약 50개 있다. 아동·청소년 전문 재활병원이 턱없이 부족해 ‘재활 난민‘이 발생하는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높은 수치임에 틀림없다. 독일에 아동·청소년 전문 재활병원이 이토록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독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쟁을 통해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은 수많은 국민을 치료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재활병원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이 어린 부상자나 고아 등을 보호하기 위해 보육원 내지 고아원과 병원이 결합한 형태의 시설들을 짓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설들과 재활병원은 훗날 아동·청소년 전문 재활병원으로 탈바꿈했다.
이와 동시에 독일은 장애아동·청소년의 건강 문제가 이들의 학업능력, 자존감 발달, 가족관계, 나아가 사회적 관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점을 일찌감치 인식했다. 그 결과 아동·청소년 전문 재활병원의 중요성이 대두되었고, 국가는 재활병원을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독일의 아동·청소년 전문 재활병원은 장애나 중증질환이 있는 아동·청소년 뿐만 아니라 비만, 마약·알코올중독, 인터넷중독, 트라우마, 피부질환, 호흡기질환 등이 있는 아동·청소년까지 대상을 확대하여 체계적인 재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치료 뿐만 아니라 충분한 휴식과 교육을 보장하는 재활병원
독일 재활 시스템의 가장 큰 특징은 환자에게 재활치료와 동시에 충분한 휴식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재활병원은 대부분 자연 속이나 전망 좋은 휴양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환자는 고요한 자연 속에서 심신의 안정을 되찾고 기력을 회복할 수 있다.
장애아동·청소년 재활은 최소 4주 정도 소요된다. 재활기간이 길다 보니 아동·청소년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도 함께 제공된다. 재활병원 부지 안에 유치원과 학교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서 미취학 아동은 유치원에서 돌봄을 받고, 취학 아동 및 청소년은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다. 청소년의 경우 전문 직업상담가를 통해 진로상담도 받기도 한다.
아동·청소년 전문 재활병원은 실내 놀이터, 실외 놀이터, 수영장 같은 시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야외활동 프로그램도 제공하므로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 놀고 자연을 만끽하면서 재활치료를 받는다.
독일의 경우 성인은 보통 4년마다 재활을 재신청할 수 있는데, 아동·청소년은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재신청을 할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부모·형제자매도 참여 가능한 재활
재활 대상자가 12세 미만일 경우 부모가 동행할 수 있으며, 12세 이상일 경우에는 필요에 따라 부모, 심지어 형제자매도 동행 가능하다.
암이 있거나 장기이식, 심장수술 같은 대수술을 받은 아동·청소년에게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참여 가능한 ‘가족 중심 재활(familienorientierte Rehabilitation)‘이 제공되기도 한다.
이처럼 독일은 아동·청소년 재활과정에 부모 내지 가족을 적극 포함시킴으로써, 가족의 심신회복을 도모하고 부모교육과 부모상담을 통해 부모 역량을 강화하는 데에도 주력한다.
본인부담이 거의 없는(?) 재활
아동·청소년 재활비용의 경우 대부분 의료보험공단 같은 재활담당기구가 전액 부담한다. 물론 하루에 10유로 정도의 자기부담금이 발생하기도 한다. 재활담당기구는 교통비와 가사지원금 같은 추가비용도 지급한다.
물론 이러한 '혜택'이 가능한 데에는 그럴 만한 '대가'가 있는 법이다. 일반적으로 독일인은 소득의 40% 정도를 세금으로 낸다. 세금에는 사회보험료(건강보험, 실업보험, 요양보험, 연금보험)가 포함된다. 재활병원은 이러한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시설이다보니 엄밀히 따지면 재활비용에서 본인부담이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다.
재활은 휴식이다
얼마전 필자는 중증장애가 있는 6살 딸과 함께 4주간의 재활을 받고 돌아온 독일친구에게 재활병원에서의 하루일과를 전해 들었다.
공식적인 하루일과는 오전 7시반부터 시작한다. 엄마와 딸은 식당에서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이후 딸은 정해진 하루 일과표에 따라 물리치료, 언어치료 등 각종 재활치료와 유치원 돌봄을 받는다. 그 시간 동안 엄마는 부모교육, 부모상담을 받거나 병원 주변을 산책하며 휴식을 취한다. 오전 프로그램이 종료되면 엄마와 딸은 식당에서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이후 딸은 오후 프로그램(재활치료, 유치원, 각종 놀이활동)에 참여한다. 그러는 사이 엄마는 오전과 마찬가지로 부모교육을 받거나 휴식을 취한다. 오후 프로그램이 종료되면 엄마와 딸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가 하루를 마루리한다.
친구는 말한다. 아이의 재활이 곧 자신의 휴식이라고. 아이의 재활을 통해 자신은 반복되는 일상과 육아의 부담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 다시 집중할 수 있고, 충분한 휴식을 통해 심신을 회복하여 일상에 복귀할 수 있다고.
휴식을 중요시 하는 독일, 휴식이 중요한 재활
독일과 한국 문화의 차이점 중 하나는 바로 '휴식문화'이다.
예를 들어 독일에는 근로자의 법정연차휴가일이 30일 정도이다. 근로자는 일년 중 휴가를 골고루 배분하여 규칙적으로 일을 잠시 쉰다.
학교방학은 일년 중 75일이다. 흥미로운 점은 방학이 부활절방학, 여름방학, 가을방학, 크리스마스방학, 겨울방학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어 학생들은 보통 2달 정도 학교를 가고 2주 정도(여름방학은 6주 정도) 학교를 쉰다.
즉, 독일의 경우 (장애)학생과 (맞벌이)부모가 일년 중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기회와 여유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많은 편이다.
여기에 재활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구축되어 있다보니, 장애아동·청소년과 가족은 재활 프로그램을 통해 한번 더 재충전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아동·청소년 전문 재활병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문제도 있지만, 아동·청소년 전문 재활병원의 초점이 여전히 치료에만 국한된 것 같은 인상이 든다.
그러나 아동·청소년 재활은 치료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 재활을 통해 장애아동·청소년은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 재활을 통해 부모 역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재충전할 있어야 한다. 이러한 휴식과 재충전의 기회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제공된다면 금상첨화이겠다. 독일의 사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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