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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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05-30 13:53 조회56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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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아닌 우리라는 ‘공존의식’…’다양성 인정해야’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22-05-30 13:35:41
강릉원주대학교 김지혜 교수가 차별에 대하여 2019년 ‘선량한 차별주의자’란 책을 출판한 후 현재까지 63쇄나 발행을 하였으니, 차별에 대한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셈이다.
저자는 혐오 표현에 관한 토론회에서 ‘결정장애’란 말을 무심결에 사용하였다가 장애인 인권 활동가로부터 ‘결정장애’란 말에서 장애는 ‘열등함, 부족함’이라는 부정적 의미가 들어 있으므로 비하 발언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차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차별은 악의적이거나 의도적인 것만이 아니라 감수성 부족이나 무심결에 고정관념이 내재화되어 차별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도 한몫 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무의식적인 차별 의도가 없이 차별을 하는 사람을 ‘선량한 차별주의자’라고 명명하였다.
이주민에게 “한국인이 다 되었네요”라고 하든가, 장애인에게 “희망을 가져요”, 여교사에게 “여교사가 신붓감으로 최고지요”라는 말들은 듣는 입장에서는 모욕적인 말이 될 수 있다. 칭찬 같지만 아직은 한국인이 아니라는 말이 되고, 장애인에게 현재는 희망적이지 않다는 의미이며, 여교사는 결혼지상주의의 대상화가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선량한 차별주의자’란 용어를 통해 ‘선량하다’와 ‘차별’이 상호 연결되기 어려운 단어임에도, 의식하지 못하거나 외면해 버리는 차별에 대해 이를 해소하기 위해 차별을 당하는 입장을 지지하고 적극 참여하여야 함을 지적한다.
여성인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며, 남성인권운동도 필요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여성평등 정책을 역차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성도 국외의원이 되고 대통령도 되니 차별은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능력이 없음에도 균형을 맞추기 위해 특혜를 보고 있다고 말한다.
여성이 안전을 외치면 남성은 모두 성범죄 취급을 받는 기분을 느끼며,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며, 권리를 호의로 해석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이미 가지고 있는 특권은 특권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며, 평등이나 불이익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하나 마련하거나 사례가 나오면 평등해졌다고 믿는다.
이를 토크니즘(토큰을 지불한 효과)이라고 한다. 장애인 중에 위인이 나오면 너도 그렇게 될 수 있으니 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노력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다. 잘못된 시각에서 평등을 바라보는 것을 ‘기울어진 운동장 효과’라고 하는데, 자신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상대의 위치에서 바라보아야 기울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이익 가능성보다 손실 가능성에 더 민감하여 가진 자의 기득권이 힘을 잃을까 역차별을 주장하는데, 이를 손실 회피 편향이라고 한다.
여성이면서 장애인, 이주민이면서 여성 등과 같이 약자가 중첩될 경우, 장애인 정책 따로 여성 정책 따로는 시행하지만, 장애여성 정책은 없다.
이주민이 사회적 혼란과 범죄를 일으킬 것이라며 자신은 극우파가 아니라 서민이라며 자신의 목소리가 정당함을 힘주어 말하지만, 이주민으로 인한 국내 여성의 안전만 이야기하지 이주민의 여성문제는 눈을 감아 버리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이를 교차성이라고 하는데, 갈등은 ‘그들’로 보기 때문이며, ‘우리’로 보면 해결될 수 있다.
계층별로 사회적 정체성을 갖기 마련인데, 부정적 고정관념인 낙인이 결과적으로 고정관념대로 되게 만든다. 말이 씨가 되듯이 되는 것이다. 이를 고정관념의 내면화로 인한 ‘고정관념의 압박’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악순환의 고리가 된다. ‘여자는 원래 그래’란 말과 같이 실제로 약자가 되어 버린다.
사람들은 입사 시험에 정장을 입듯이 때로는 상대의 편견에 맞추어 주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의 예로 흑인 아이에게 흑인 인형과 백인 인형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백인 인형을 고른다. 새장의 새는 철망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눈앞의 철망 중의 줄 하나를 보기 때문에 갇혔음을 모르듯이, 인간도 전체적 상황이 아닌 한 가지 상황에 집중하도록 사회화되어 있다. 이는 약자의 사회적 고정관념의 내면화된 결과이기도 하다.
개그에서 ‘맹구’는 웃음의 소재이고 유머의 수단이라 여길 수 있으나, 사람들은 자신보다 부족한 계층을 대상으로 웃기 때문에, 이런 우월성 이론에 의해 차별적 유머를 던질 때 경시풍조가 조성되는데, 이를 편견규범이론이라고 한다.
‘똥남아’, ‘급식충’ 등 인간의 비인격화한 신조어들은 웃음문화라는 명분 아래 편견이 봉인되어 버린 것이다. 남성이 ‘김치녀’라고 말할 때 여성은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아픔을 느끼지만, 이에 대하여 여성이 ‘한남충(한국남성)’아란 말을 하는 것은 분명 강도가 다르다. 이것은 호명권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장애자’에서 ‘장애인’으로 이름을 바꾸어도 편견은 바뀌지 않는다. 잠시 지워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명권력을 타인에게 주지 않고 당사자가 스스로 가지면서 해석을 긍정적으로 전유해버리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는 정체성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농인’, ‘맹인’(맹: 한자는 눈이 망가짐을 의미), 퀴어(성소수자, 괴기하다는 의미)가 이에 해당할 수 있다.
정치인이 상대 정당인에게 ‘귀거 먹었다’라고 하면 장애인에게 한 말이 아니므로 비하 발언이 아니라고 사과하면서도 변명을 하는데, 이러한 비하는 약자계층을 지칭하는 데에서 가져오는 것이지 권력을 가진 사회 현상에서 가져오지 않는다. 조롱에 장애인을 부정적으로 빗대는 것이므로 비하가 맞으며, 비하 언어로 차별하는 것에 대응하는 방법은 웃어주지 않고 무반응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소극적 자세로 말한다.
편향된 능력주의는 차별은 정당하다고 하는데, ‘무지의 장막’을 하여 계층적 조건이 모두 완전히 지워진 후 능력만을 본 것인지 판단해 보아야 한다. 입사 시험에서 아무리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다고 하여도 가려진 정보들은 간접적으로 추리할 수 있어 반영된다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결과에서 차이가 거의 없다고 한다.
다양성의 인정에서 상호 존중되지 않고 흡수되거나 하나를 더 우월하다고 여기거나, ‘다문화아동’과 같이 구분을 하는 용도로 사용된다면 이는 차별을 조장할 뿐이다. 편의시설 미비나 거부로 공공장소에 입장할 수 없다면 그 공간에는 거절당한 사람은 보이지 않게 된다. 사람들이 장애인을 잘 보지 못하는 이유다. 여성이 인구수가 소수가 아니라 이렇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소수자이다.
사람은 누구나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할 수 있다. 하지만 권력자가 싫다고 할 때는 차별이 일어난다. 상사나 교사가 특정 사원이나 학생을 싫다고 하면 문제가 되는 것과 같다. 성소수자 문제도 문재인 전대통령이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싫다고 한 적이 있는데, 동성애자가 아닌 사람도 성소수자에 비해 권력자이므로 싫다는 표현은 차별의 표현이다.
그리스 시대 아고라는 민주의 상징이지만, 그곳의 입장 자격은 제한이 있었다. 그러므로 한 영토 안에 권력의 배분이 평등하지 않으면 반민주적 폭정이 있는 것이다. 안전과 질서라는 말은 인권을 제한하기도 하는데, 원래 인권이란 단어는 폭정에 저항하는 초법적 행동에서 유래한 용어로, 공공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양심적인 행동이라면 시민불복증은 인권의 문제 제기 방식으로 ‘말 걸기’라고 저자는 말한다.
단순히 장애인들이 지하철을 타고 내렸을 뿐인데, 이를 비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다수자는 소수자를 거침없이 공격할 수 있는데, 왜 소수자는 순화하여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한다.
심지어 완전히 판을 뒤집는 혁명도 모두를 부정하고 파괴할 수도 있으며, 그 책임보다는 효과에 지지를 받을 수도 있다. 무질서는 새로운 질서를 창조한다. 하지만 촛불집회로 억울함을 호소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다 국민의 권리가 보장되도록 세상을 바꾸려 동참한 사람도 있고, 이를 정치에 활용하여 권력을 잡는데 사용한 자도 있고, 그 권력을 평등하게 나누지 못하고 독식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단순히 차별적 시선으로 인권운동에서 자신의 피해 입장만 불평하는 사람도 있지만, 소수의 인권운동이라 하더라도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평등을 쟁취하는 권력이 소수에게만 집중화되거나 비폭력이지만 폭력보다 더 타격을 주는 철저한 전략에 매몰된 기술자로 전락하거나,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하여 이를 드러내기 위해 고의적 괴롭힘의 방법으로 타인에게 가하는 의도된 심각한 피해를 정당화하는 것은 선을 넘는 것이다.
저자는 단순히 시민과 정치인의 따가운 시선만 언급한 것은 아쉬움이다. 행사장 점거처럼 약자를 대변하여 약자가 아닌 이미 권력자로서 이벤트를 권력화하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아야 한다.
보편성과 다양성에서 주류집단의 입장을 보편성으로 착각하기 쉽다. 차이를 인정한다는 말은 다름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 모색과 다양성을 수용한다는 말이다. 차이 자체를 차별의 정당한 조건으로 인식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모두를 위한 인권에 책임이 있으며, 평등을 향한 운동에 동참하여 누구나 살만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인권보장을 법과 제도로 접근하는 국가 책임과 각자 개인이 이행하고 차별행위 시 져야 할 책임으로 나눌 수 있다.
인권존중과 권력 배분은 공존 사회를 이룰 때에 가능해지며, 소수자의 이익은 다수자의 피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 그들이 아닌 우리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공존이 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 한국인은 우리집, 우리동네, 우리아저씨 같이 우리를 너무 즐기며 소유나 편으로 인식하는데, 이제 공존의 의미로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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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서인환 (rtech@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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