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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원은 독립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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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1-20 09:57 조회6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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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원은 독립생활

 

뇌병변장애 유민기 씨의 삶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靜寂).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湖心)아.’

 

이 시는 박두진 시인의 ‘꽃’이다. 시인은 꽃에서 생명의 탄생과 신비를 복합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사랑의 체험으로 사랑의 온도를 측정하는 것 같다. 사랑과의 이별에서 비밀한 울음으로, 때로는 아픈 피 흘림과 엇갈림의 핏방울처럼 가슴이 찢어지는 상처로 기록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황홀한 한 떨기의 꽃으로 아름답게 피워 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꽃, 즉 사랑은 우주 만물의 근원인 동시에 생명의 궁극적인 귀결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이 갈구하고 노래했던 생명의 실체는 결국은 자연과 인간의 황홀하고 아름다운 사랑이고 호수처럼 가슴에 일렁이는 사랑의 마음이다.

 

생명의 탄생과 그 아름다운 신비는 장애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민기 씨의 탄생은 생명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느끼기도 전에 그의 부모님은 눈물 흘리는 것부터 배워야 했다.

 

유민기(1994년) 씨는 부산 해운대에서 건설업을 하는 부모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이는 조산아로 태어났다. 아이는 미숙아였기에 인큐베이터에 있었다. 유민기 씨는 태어날 대부터 뇌성마비라 계속 병원을 다녔다고 했다.

 

뇌성마비란 미성숙한 뇌의 손상으로 자세와 운동에 이상이 생기는 질환으로 어린이에게 발생하는 가장 심각한 장애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뇌성마비라는 말에 사지가 꼼짝을 못하는 줄 알고 절망하지만, 뇌성마비가 완치되는 질환은 아닐지라도 많은 수의 어린이들은 성장하면서 적절한 재활치료를 통해 스스로 보행도 가능하며, 교육을 받을 수도 있고, 직업을 갖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독립적인 삶을 유지할 수도 있다.

 

뇌성마비는 운동기능 장애에 초점을 맞추어 정의하고 있으나, 미성숙한 뇌에 생긴 병변이 운동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므로 운동장애를 일으키는 뇌손상이 여러 다른 장애도 동시에 유발할 수 있다. 그러나 뇌성마비의 원인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임신 중, 출산 시, 출산 후의 병력과, 임상양상 등으로 추정할 뿐이다. *네이버 지시백과에서 발췌. 

 

그러나 유민기 씨는 자신이 어렸을 때는 잘 기억을 못하므로 필자가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유민기 씨의 어머니 이**(56살) 씨는 아이가 미숙아로 태어날 줄 상상도 못했단다. 처음에는 아이가 인큐베이터에 있어 잘못 될까봐 노심초사 하면서 하루하루를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 “시간이 지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가 되었으나 큰 애하고는 많이 달랐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또 다른 절망이었다. 여기저기 용하다는 병원을 찾아다니며 물리치료를 받았다.  

 

어머니 : “병원에서 다른 아이 어머니를 알게 되어 장애인복지관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녔습니다.”

 

아이는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지만, 복지관 선생님은 장애판정을 받아 보라고 했다.

 

어머니 : “세살 때 고신의료원에서 뇌병변장애 1급을 받았는데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무너져 내린 하늘 아래서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위해 더 많은 물리치료실을 찾아 다녔다.

 

어머니 : “우리 민기가 어렸을 때는 물리치료 받는 것을 많이 힘들어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물리치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 : “아이가 잘 걷지는 못해도 물리치료 덕분에 상반신은 그런대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유민기 :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바로 앉히려고 하셨는데 바로 앉혀 놓으면 픽 쓰러지고, 픽 쓰러지고 바로 앉지를 못하더랍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 등에 업혀 다녔고 조금 나이가 들자 유모차를 타고 다녔다. 요즘은 어린이 휠체어도 많이 있지만 당시만 해도 어린이 휠체어는 별로 없어서 유모차를 타고 다녔다는 것이다.

 

유민기 : “재활의학과도 다니고, 어떤 곳에서 언어치료를 받고 또 다른 곳에 행동치료를 받는 등 그 때는 병원 가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유민기 씨가 출생 당시에는 해운대에 살았는데 사하구로 이사를 했다. 5살 쯤 되었을 때 어머니는 장애어린이집을 물색해서 아이를 어린이 집에 보냈다. 사하구에는 장애어린이집이 그가 다닌 **어린이집 밖에 없었다. 

 

유민기 : “혼자 서지는 못했습니다. 어린이집 봉고차가 집 앞까지 오면 어머니가 저를 안고 봉고 차에 태워 주었고, 어린이집에서는 선생님이 안아 주었는데 저는 뛰어 다니지 못하니까 어린이집에서는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어린이집에는 가만히 앉아 있거나 손바닥으로 기어 다녔다. 그는 다리는 사용할 수가 없지만 두 손은 그런대로 사용할 수가 있었다.

 

유민기 : “어머니가 처음에는 일반학교에 보내려고 했는데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일반학교가 없어서 그래서 찾아 낸 곳이 혜송학교였습니다.”

 

부산혜송학교는 서구 남부민동 천마로에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송도라고 했다. 부산혜송학교는 1997년 부산맹학교가 동래구 명장동으로 이사를 하고 그 자리에 새로 지어진 특수학교이다. 사하구와 서구, 영도구와 중구 등에 거주하는 지적장애 및 지체장애인의 교육을 위해 설립되었는데 2000년 1월 1일 개교 하였다.

 

유민기 : “2001년 3월에 혜송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운전을 해서 아침마다 학교까지 데려다 주었다.

 

유민기 : “신설학교라서 그런지 학교가 엄청 깨끗하고 좋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일대일 맞춤교육을 했는데, 처음에는 한글을 배우고 나중에는 숫자를 배웠다.

 

유민기 : “숫자를 배우고 더하기 빼기 등 수학을 배우는 것이 정말 재미있고 신기했습니다.” 

 

학교에서는 학과수업 외에 물리치료 시간도 있었다. 

 

유민기 : “그때만 해도 실무원 선생님이 없던 시절이라 엄마들이 점심을 먹여 주었습니다.” 

 

요즘은 특수학교에도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있어 학부모는 자녀가 수업을 받는 동안 원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가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별다른 프로그램이 없었기에 학부모 대기실에서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유민기 : “엄마가 밥을 먹여 주고는 다시 대기실에서 기다렸는데, 엄마가 학교 운영위원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학교에는 한반에 7~8명이 있었는데 장난감 김밥 말기, 도미노 쌓기, 색칠하기 등 주로 놀이치료에 치중했다.

 

유민기 : “색칠하기를 좋아했고, 운동시간에는 보치아를 했습니다.” 

 

보치아는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과 운동성 장애인만이 참가할 수 있으며, 표적구에 가까운 공의 점수를 합하여 승패를 겨루는 경기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공 던지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로마 시대 때 전역에서 성행했다고 한다. 1982년 덴마크 국제경기에서 국제경기종목으로 부상되어 1984년 뉴욕장애인올림픽대회에서 시작되었고, 1988년 서울장애인올림픽대회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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