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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먼저가 오히려 불편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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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10-14 09:14 조회7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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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먼저가 오히려 불편을 줄 수 있다

 

남산 케이블카 동행 1인만 허용해 이산가족 장애인단체 중 장애인먼저실천운동본부라는 곳이 있다. 이 단체의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장애인먼저실천운동이란 설명을 보면 장애인의 인권과 비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운동이라고 되어 있다. 인권은 무엇이고, 권리란 무엇인가? 인간이 가진 권리가 인권이라면 인권이나 권리나 같은 말인데, 장애인에게는 인권이 있고 비장애인에게는 권리가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최근 사회 지도층들이 언론이나 국민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거나 지나친 관심사가 될 경우, 그들은 우리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다. 사회적 약자가 아닌 지도층이 인권을 주장하면 도대체 누가 인권을 보호받아야 할 대상인지 알 수가 없다.

 

권력과 인권은 다를 것이다. 인권은 강자이든 약자이든 모두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이다. 하지만 어떤 권력에 의해 그것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우리는 인권을 주장하게 된다. 여기서 권력은 입법, 사법, 행정의 권력만이 아니라 언론이나 시민단체, 특정 집단에 의한 의식적, 무의식적 힘을 말할 것이다.

 

하지만 권력에 대항하는 인권은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을 이용하여 개인적, 불법적 이익을 추구할 경우 약자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 되는데, 종종 권력자가 그 불법적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타인의 인권을 침해한 것에 대한 공격을 방어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약자의 입장이 되어 동정을 받거나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변하기도 한다.

 

헌법에서는 모든 국민은 권리를 가진다고 하여 권력자이든 약자이든 동등함을 이야기하지만, 이 동등함은 동등하지 못한 사람이 동등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권력자가 그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인권을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인권은 약자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장애인차별금지법(4조 4항)에서는 장애인의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취한 적극적 조치는 역차별로 보지 아니한다고 하고 있다. 인권은 존엄성에서 출발한 것으로 권력자가 자신을 존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으로, 권력자가 인권을 자신의 방어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며, 인권이란 말을 이용하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며, 인권이 권력자의 무기가 될 경우 그 사회는 최고의 위기를 맞게 된다.

 

장애인의 인권을 말하면서 비장애인의 권리를 말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장애인이 비장애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말인지, 장애인에 대한 지나친 요구는 비장애인의 권리를 넘을 수도 있다는 말인지 모를 일이다. 왜 비장애인의 권리를 장애인먼저실천운동본부의 목적에 포함하고 있을까?

 

또 이 단체는 나눔과 배려를 통해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에티켓을 인식시키고,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사회의 물리적 장벽으로 인한 정서적, 사회적 불리를 국민운동 차원에서 개선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나눔, 배려, 에티켓이란 용어가 적절한가도 다시 볼 단어이다.

 

나눔이란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나누어 평등하게 한다는 의미이니 재분배를 의미한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시간을 나누는 것도 나눔이다. 하지만 나눔은 시혜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동등함은 나눔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인권은 나눔이 아니라 독립성의 인정에서 이루어진다. 권리를 누리도록 하는 것이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하늘이 준 권리인데, 배려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결국 동등하지 못하고 권력자의 덕에 의해 인권은 달성된다는 말이 된다.

 

에티켓은 예절인데,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지지 않는 것이 예절일 수 있다. 상대를 존중하게 대하는 것은 분명 예절이다. 그렇다면 정서적, 사회적 장벽이 예절이 없어서 발생한 것인가?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는 인식을 개선하기도 하고, 인권을 향상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무를 다하는 것을 넓은 의미 또는 적극적 의미에서 인권으로 보는 현실에서는 에티켓은 직접적 인권 침해를 하지 않은 소극적 인권으로 해석된다. 이제 인권은 하나의 서비스이고, 전문성을 띤 영역이 되었다.

 

장애인만을 위하면 인권은 해결될까? 장애인이 가족(부인과 어린 아들과 딸 동행)과 함께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검색대에서 안내원이 장애인 전용창구로 안내하였다. 장애인 혼자 떨어지면 안 된다고 하자, 그럼 부인은 장애인과 같이 장애인 전용창구로 가라고 안내했다. 온 가족이 모두 장애인 전용창구로 가려고 하자, 안내원은 가족 한 사람만 장애인 동행으로 인정된다고 하였다.

 

비행기 탑승에서 할인은 중증 장애인은 동행인 1인이 포함된다. 이 해석이 확대되어 모든 서비스에 동행인 1인만 적용한 것이다. 결국 부인과 장애인은 전용창구로 들어가고, 어린아이들은 출국심사 절차를 몰라 방황하게 되었고, 아이들만 출국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아 출국심사에서 거부되어 1시간 동안 심사장 주변에서 울면서 부모를 기다려야 했다.

 

종종 장애인단체에서 장애인과 함께 여행을 하게 되는데, 장애인은 먼저 탑승을 하고, 내릴 때에는 맨 나중에 하기를 하게 된다. 탈 때와 내릴 때에 일행들은 이산가족처럼 흩어졌다가 서로 기다리는 일이 발생한다. 장애인먼저 에티켓으로 배려를 받는 것인지, 아니면 장애인의 특별한 절차로 인하여 불편을 감내하여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운 순간이다.

 

케이블카를 타러 한 장애인이 가족과 함께 남산에 갔다. 남산은 휠체어 장애인을 위해 케이블카를 타는 곳에 단차를 제거하였다고 뉴스를 보았고, 남산에 올라가 서울을 내려다보면서 가을도 즐기고 싶었다. 표를 구매하고 케이블카를 타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직원이 장애인을 발견하고는 장애인먼저운동을 한다면서 먼저 입장을 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장애인과 함께 동반 입장할 수 있는 인원은 한 사람으로 제한하였다.

 

여러 가족 중 두 사람은 먼저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에 올랐지만, 다른 가족들은 줄을 서서 케이블카를 타고 오니 남산 위에서 다른 가족이 도착할 때까지 40분이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가 지치고 기분이 나빠져서 모처럼의 나들이를 접고 바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내려오는 데에도 40분이나 남산 아래에서 장애인은 가족을 기다려야 했다. 장애인이 먼저 탑승한 것은 분명 에티켓이고, 존중이었다. 하지만 먼저 간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히려 40분이나 가족을 기다리며 불안해하는 괴로움을 당한 것이다.

 

아무리 장애인먼저운동을 하여도 절대 장애인먼저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 있다. 지하철에서 출퇴근 시간대의 승차가 그렇다. 먼저 타고 싶어도 탈 공간이 없다. 휠체어 장애인은 혼잡한 시간대를 피해 다녀야 하는 신세이고, 그렇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거나 눈총을 받아야 한다. 눈총을 받아도 탈 수만 있다면 다행이다.

 

놀이공원에 가면 장애인은 줄을 서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먼저 탑승을 시켜 준다. 이는 장애인먼저운동 차원과는 좀 다르다. 장애인을 별도로 구분하여 안전관리를 직원이 하기 편리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장애인은 더 많은 놀이기구를 탈 수 있고, 기다리며 보내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저신장 장애인은 탑승 자격에 키가 얼마 이상이어야 한다는 조건에 의해 거부당하고, 지체장애인은 탈 수 있는 접근성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탈 수가 없으며, 발달장애인은 가족의 동반이 아니면 탈 수가 없다. 발달장애인 부모는 아이를 위해 아무리 어지러워도 놀이기구를 같이 타야 한다. 녹초가 되더라도 아이를 위해 정말 그날은 희생을 해야 하는 날이다.

 

정말 안전이 염려된다면 전문성을 가진 안전요원이 동승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안전사고에서 모든 책임은 안전하게 보호하지 못한 자신들의 책임이 되니, 가족에게 안전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유리한 가족의 동반을 요구하는 것이다.

 

한 놀이공원에서 발달장애인이 놀이기구를 타고자 하나 가족이 없어 거부당하는 것을 보고 한 행인이 보호자로 같이 탑승하겠다고 나섰다. 장애인 가족의 고소공포증으로 장애인도 탑승을 포기해야 하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직원은 가족임을 증명할 수 있는 신분증을 제시하여 주소가 같은지 확인해야만 탑승을 허용하겠다고 하였다.

 

직원은 국민의 신분증을 검사할 수 있는 공무원인가 싶었고, 장애인은 화물표를 붙여 실어 보내는 화물취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공항에서 “타인이 부탁한 물건을 대신 가지고 탑승하면 안 됩니다. 처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는 안내문구가 겹쳐 뇌리를 스치면서 장애인은 존중이나 먼저의 에티켓이 아니라 먼저를 빙자한 화물로 취급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 먼저가 분리를 조장하거나, 다른 일생들과 비록 잠시라도 헤어져 케어를 방해하거나 서로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이런 규정들은 인권이 아니라 규정에 있으니 행하는 것으로 인권에 오히려 반하는 인권운동이 될 수도 있다. ‘먼저’가 배려나 에티켓이 아니라 존중과 진정한 인권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장애인 먼저실천 운동에 감수성의 옷을 입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장애인 이름의 사업에 불과하다.

 

최근 자신의 인권을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의 인권을 무시하거나 세미나장에서 자신의 독무대를 만들어 왜 장애인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았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소란을 피워 행사를 망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인권을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무기로 만들어 자신이 강자가 되기를 바라는 행위 역시 스스로 경계해야 하는 인권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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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서인환  (rtech@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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