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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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3-25 09:09 조회65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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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 시는 송명희 시인의 ‘나’이다. 송명희 시인은 중증 뇌병변(뇌성마비) 장애인으로 태어나 울지도 못하고 몸을 가누지 못했다. 어머니가 몸이 약해 젖도 먹이지 못하고 우유도 사 먹이지 못하는 가난한 집안이라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어 외로움과 고통이 너무 컸다.
그래서 태어난 세상과 부모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죽고 싶어 그저 무조건 반항할 뿐이었다. 몸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과 영혼은 완전히 망가지고 깨어져서 버려질 질그릇이 되어버렸다.
송명희 시인이 16살 되던 해, 그녀가 극심한 절망에 빠졌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시를 쓰기 시작했다. 약하고 보잘것없던 깨어진 질그릇을 하나님은 잘난 것들보다 더 풍성한 은혜를 전하신다는 내용이다. ‘나’는 송명희 시인의 많은 시 중의 하나로 찬양곡으로 불리고 있다.
필자가 정재문 씨를 만났을 때 좋아하는 시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나’라고 대답하면서 불러 봐도 되냐고 했다. 정재문 씨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난 후 필자는 힘껏 손뼉을 쳤다.
정재문(1995년) 씨는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2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별문제 없는 보통의 아이였다.
정재문 씨와 필자가 만났을 때 할머니가 동행했었다. 그래서 할머니와 정재문 씨 그리고 어머니의 이야기를 구분하기 위해 앞에 표시하였다.
재문 씨의 가정에 불행이 다가온 건 두 달 정도 된 후였다. 당시 재문 씨의 친할머니는 재문 씨 가족과 따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손자를 보러 갔다. 며느리가 "아이가 눈을 안 맞춘다."고 할머니에게 하소연했다.
할머니: “아기들이 있는 집에는 보통 모빌을 달아 두는데 재문이가 모빌을 안 보는 거예요. 그래서 당장 다음 날 부산에서 제일 잘한다는 안과에 데리고 갔습니다. 자기네들은 잘 모르겠다고 대학병원으로 데리고 가라기에 또 부산대학병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해 봤지만, 아직 아이가 어려서 뭐라 말하기 어렵다고 6개월 후에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6개월 후 부산대학병원을 다시 방문했다. 지난번 했던 검사를 다시 했고 결과는 시신경 손상이라는 답변이었다. 부모님과 할머니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꼈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갔다고 했다.
할머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울대학병원 유영석 박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최고 권위자였거든요. 하지만 우리의 작은 희망과는 상관없이 결과는 똑같은 시신경 손상이고 수술도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할머니는 의사의 손을 잡고 매달렸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개안수술을 한 이야기를 본 기억이 났다.
할머니: “나는 이제 다 살았으니 내 눈이라도 좀 이식해 주이소.”
의사: “할머니 이 손 좀 놓고 내 이야기 들어 보세요. 아무리 좋은 텔레비전을 갖다 놔도 전기가 없으면 볼 수 없습니다. 얘는 전기 즉 시신경이 죽어서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의사는 1년 후에 다시 오라고 했지만 이미 시각장애 판정을 받았고, 검사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 이후로는 안 갔다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재문 씨가 어느덧 4살이 되었다고 한다. 그때쯤 할머니는 재문 씨와 함께 살게 되었다. 재문 씨는 비록 앞은 볼 수 없었지만 밝고 구김살 없이 자랐다.
정재문: “어머니께서 동화책을 정말 많이 읽어 주셨는데 제가 동화책 내용을 다 외울 정도였어요. 동요도 정말 많이 불러 주셨어요.”
그 무렵 재문 씨의 아버지는 컴퓨터 판매점을 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동생을 임신 중이었다.
할머니: “하루는 재문이랑 둘이 집에 있는데 텔레비전 화면 아래에 자막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재문이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지나가는 자막은 **복지관에서 점자교육을 한다는 것이었다. 눈이 번쩍 뜨이는 문구였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고, 재문이를 업고 버스를 타고 **복지관을 찾아갔다.
할머니: “**복지관에서는 중도 실명자를 위한 점자교실이라 대부분이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시각장애인 손자를 위해 일주일에 두 번 하는 점자교실에 열심히 나갔다.
할머니: “점자를 가르치는 선생이 기역은 사점, 니은은 일사점, 디귿은 이사점……. 노래를 가르쳐 주셔서 지금도 점자는 다 기억합니다.”
할머니는 손자를 위해서 못할 것이 없었다. 아이를 업고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복지관에서 점자를 배우면 재문이는 복지관이 할머니 학교라고 했다. 할머니는 운전면허가 있었지만 당시에는 운전하지 않았고 아이가 부산맹학교를 다닐 때는 운전을 했다고 한다.
할머니: “재문이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점자를 가르쳤는데 특별히 가르칠 것도 없었습니다.”
아이는 할머니가 배우는 점자교실에 따라다니면서 이미 점자를 다 익혔던 것이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나이가 되어서 전국에 있는 유치원을 수소문했습니다.”
이 애를 어디에 보내야 제대로 교육을 할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알 만한 사람들에게는 전화를 해서 알아보고, 전국에 있는 맹학교에도 다 전화하고 직접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충주맹학교였다. 현재는 충주성모학교다.
부산맹학교에도 유치부가 있는데 어린아이를 왜 그 먼 곳까지 보냈을까.
할머니: “부산맹학교는 생각도 안 났고, 충주맹학교는 가톨릭에서 수녀님들이 운영하고 있어서 믿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재문이를 충주맹학교 유치부에 입학시켰다. 재문이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는데 어린아이가 그런대로 잘 적응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 “내가 고집을 부려서 재문이를 충주맹학교에 입학시켰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왜 그리 눈물이 나든 지…….”
토요일이면 재문이를 데리러 갔다. 아들이 승용차로 갈 때는 며느리와 재문이와 함께 놀이공원도 갔다가 집으로 데려오기도 했지만, 아들은 한 달에 한 번쯤 가고 나머지는 할머니가 혼자 갔다.
할머니: “혼자 갈 때는 새벽 다섯 시에 구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갔는데 충주역에 내리면, 내가 뭔 죄를 지어서 이런 벌을 받나 싶어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할머니는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연신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치면서 충주역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학교까지 가서 재문이를 데리고 나왔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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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남 기자 (gktkr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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