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복지 중심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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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7-18 08:16 조회1,06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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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복지 중심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인터뷰: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김동범 사무총장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17-07-17 13:19:51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김동범 사무총장은 대학에서 토목을 전공하고 자동차 세일즈맨으로 항상 판매실적 탑(top)을 할 만큼 실력을 발휘하였다.
장애인신문사 창간 준비로 장애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0년 1월, 어느덧 장애인계에 종사한 지 28년째이다. 초창기에는 비전문가 소릴 들었지만 성균관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전문가이다.
영화배우 박중훈을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을 정도로 외모가 수려하고 그 못지않은 언변으로 장애인계의 중요한 사안들이 그의 손을 거치고 있을 정도로 영향력을 가진 김동범 사무총장은 장애인복지의 주도자이자 목격자이자 동조자이다.
질문: 장애인복지에 뛰어든 것을 후회하지 않는가.
답변: 후회하기엔 너무 늦지 않은가? 주위에서 ‘넌 왜 하필 그런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후회 같은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다.
초창기에는 장애인계에서 ‘넌 비장애인이지 않느냐.’ 하면서 배타적 적개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때는 나도 장애인을 일반적인 수준의 인식으로 바라봤다.
장애가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 장애인문제를 해결하는 데 뜻이 같으냐, 다르냐가 중요하다. 그 뜻이 같기 때문에 이제는 동지이다.
질문: 왜, 장애인복지를 선택하였는가.
답변: 지금 생각하면 운명인 듯싶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2년 반 정도 하며 새로운 일을 준비하고 있을 때 장애인신문사 창간 준비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 달 정도 일을 봐주려고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당시 기자들이 지금 장애인 운동을 치열하게 하고 있는 박옥순, 정외택이었는데 기자들과 논쟁을 많이 하게 되었다. 나는 80학번 공대생인데 당시 민주화운동을 사회구조적 모순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데 기자들이 장애인문제는 사회구조 속에서 생긴 차별이라고 했다. 정말 그러한지 물어볼 사람도 없고, 종로서적에 가서 사회학, 사회복지학… 책을 읽으며 공부했다. 그때 내가 세상을 잘못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질문: 비장애인이어서 1인자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가.
답변: 장애인계에서 1인자가 된다고 권력과 부가 생기는가? 나한텐 1인자란 의미가 없었다.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 하며 활동가로서 스스로 1인자가 되는 것이 훨씬 보람이 컸다.
질문: 그동안 많은 일을 했는데 가장 잘한 일은.
답변: 장애인 유권자 운동이다. 당시 장애인 운동으로 시위를 많이 했는데 그에 따른 희생이 컸다.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좀 더 확실한 운동 방식이 필요했다. 장애인이 참정권을 가진 유권자로서 권리를 주장하며 정책을 만들어 간 것이 가장 잘한 일 같다.
초창기에는 장애인을 이용해서 정치를 하려고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이제는 장애인 총선연대, 장애인대선연대 등을 장애인계에서 자발적으로 만들며 장애인 유권자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질문: 지금은 장애인 운동의 정체기라 말한다. 동의하는가.
답변: 글쎄… 침체기라기보다는 새로운 운동 방식을 찾고 있다는 것이 더 옳다. 정보가 많아졌다. 그만큼 장애인복지의 스펙트럼이 커졌다. 따라서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초창기에는 요구가 단순하였다. 그래서 한목소리로 세를 보여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욕구가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 토론과 협력을 통해 우선순위를 정하고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질문: 장애인이 만족하는 사회가 가능하다고 보는가.
답변: 장애인뿐만이 아니라 여성, 청소년… 만족하겠는가? 보다 많은 사람에게 만족감을 주기 위해서는 균형을 맞춰 주는 것이 중요하다. 소외 계층을 끌어올려 주는 것 그래서 조화롭게 살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사회적 불만을 줄이고 행복한 사회를 가능하게 만든다고 본다.
질문: 이제 대선 정국인데 장애인계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전략을 갖고 있는가.
답변: 장애인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정부 때이다. 그때부터 활성화되어서 노무현 정부 때 이룸센터,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성과를 올렸다. 이명박 정부 때는 연금이 이루어졌고, 박근혜 정부는 「발달장애인지원법」이 제정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대선 공약이었다. 공약으로 확정이 되어야 우선 정책이 된다. 그런데 공약이 되어도 예산이 마련되지 않으면 시행에 어려움이 많다. 공약의 실효성을 담보받기 위해서는 예산 투쟁이 필요하다.
19대 대선 공약은 인상과 제정 수준이 아니라 장애인복지가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될 수 있는 세밀하고 차원 높은 새로운 공약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공약을 세팅하는 대통령인수위원회에서부터 장애인 공약 시행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질문: 장애인복지를 하려면 정치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동안은 장애인 정치인들이 그런 역할을 했지만 20대 국회는 그 창구가 막히지 않았는가.
답변: 20대 국회에서 장애인 비례대표를 배출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각 당에서 미안해한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의원은 장애인 부모이기 때문에 장애인문제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장애인복지 창구와 연결 역할을 하려고 한다.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인 더불어민주당 양승조 의원도 일주일에 한 번씩 회의를 갖자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다.
20대 국회 장애인 비례대표가 없어서 생긴 가장 큰 손실은 국회 안에 동료로서의 장애인이 없다는 사실이다. 장애라는 화두를 갖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장애인 비례대표는 장애인 손에 의해, 장애인의 검증을 거쳐 국회에 들어가야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질문: 장총을 비롯해서 연합기구가 많은데 보통 사람들은 장애인 연합기구가 하나인 줄 안다. 연합기구를 묶을 수 있는 방안은 없는지.
답변: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공무원의 분리주의로 채택된 것이다. 장애인끼리 싸움을 붙인 결과가 되었다. 사실 비장애인들은 장총이든 장총연이든 구별도 안 되고 관심도 없다. 만약 장총만 있었다면 더 발전했을까? 그렇지 않다. 자발적 분파가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장총, 장총련이 있었기에 각자 더 열심히 노력하며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본다.
장애인계 뿐만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사회는 체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하고 그러면서 교류 협력하는 단계로 성장을 한다. 장애인계 저변에는 장총, 장총연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정서가 있다. 그 뜻이 강하다면 하나가 될 것이다.
질문: 요즘 장애인문화예술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데 장애인복지에서는 장애인문화예술을 이방인처럼 보기도 한다. 장애인복지를 위해 장애인문화예술이 필요하지 않은가.
답변: 당연하다. 장애인들이 원하는 것은 장애인공화국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살자는 것이다. 비장애인과의 사회 통합에 장애인문화예술만큼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야가 없다.
질문: 개인적으로 어떤 분야에서 능력 발휘를 하고 싶은가.
답변: 장애인계를 떠나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장애인복지관 관장을 하고 싶다. 복지관에는 지역 장애인이 있고, 종사자가 있고, 예산도 있다. 장애인운동이 지역사회 중심으로 이뤄지면 훨씬 효과가 크다.
전국에 퍼져 있는 장애인복지관이 지역사회 장애인을 위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장애인 단체정신으로 지역사회를 조직화시킨다면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동안 장애인복지관이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험으로 장애인복지관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질문: 장애인계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장애인의 날 훈·포장에서 김 총장의 이름을 본 적이 없다. 서운하진 않은가.
답변: 상이 중요하겠는가? 이제는 “우리는 말이죠.”라고 장애인문제를 내 문제로 생각할 만큼 동화가 되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실례이지만 어디가 장애세요?”라고 묻는다.
비장애인이 장애인과 함께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장애인은 어떠냐?”고 장애인을 집단화해서 평가하려고 하는데 그것 역시 개선되어야 한다.
장애인 문제는 장애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이 장애인을 받아 주지 못하는 사회 구조의 문제인데 장애인계에 처음 들어올 때나 지금이나 아직도 그 사회구조적 문제에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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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신문사 창간 준비로 장애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0년 1월, 어느덧 장애인계에 종사한 지 28년째이다. 초창기에는 비전문가 소릴 들었지만 성균관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전문가이다.
영화배우 박중훈을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을 정도로 외모가 수려하고 그 못지않은 언변으로 장애인계의 중요한 사안들이 그의 손을 거치고 있을 정도로 영향력을 가진 김동범 사무총장은 장애인복지의 주도자이자 목격자이자 동조자이다.
질문: 장애인복지에 뛰어든 것을 후회하지 않는가.
답변: 후회하기엔 너무 늦지 않은가? 주위에서 ‘넌 왜 하필 그런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후회 같은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다.
초창기에는 장애인계에서 ‘넌 비장애인이지 않느냐.’ 하면서 배타적 적개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때는 나도 장애인을 일반적인 수준의 인식으로 바라봤다.
장애가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 장애인문제를 해결하는 데 뜻이 같으냐, 다르냐가 중요하다. 그 뜻이 같기 때문에 이제는 동지이다.
질문: 왜, 장애인복지를 선택하였는가.
답변: 지금 생각하면 운명인 듯싶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2년 반 정도 하며 새로운 일을 준비하고 있을 때 장애인신문사 창간 준비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 달 정도 일을 봐주려고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당시 기자들이 지금 장애인 운동을 치열하게 하고 있는 박옥순, 정외택이었는데 기자들과 논쟁을 많이 하게 되었다. 나는 80학번 공대생인데 당시 민주화운동을 사회구조적 모순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데 기자들이 장애인문제는 사회구조 속에서 생긴 차별이라고 했다. 정말 그러한지 물어볼 사람도 없고, 종로서적에 가서 사회학, 사회복지학… 책을 읽으며 공부했다. 그때 내가 세상을 잘못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질문: 비장애인이어서 1인자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가.
답변: 장애인계에서 1인자가 된다고 권력과 부가 생기는가? 나한텐 1인자란 의미가 없었다.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 하며 활동가로서 스스로 1인자가 되는 것이 훨씬 보람이 컸다.
질문: 그동안 많은 일을 했는데 가장 잘한 일은.
답변: 장애인 유권자 운동이다. 당시 장애인 운동으로 시위를 많이 했는데 그에 따른 희생이 컸다.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좀 더 확실한 운동 방식이 필요했다. 장애인이 참정권을 가진 유권자로서 권리를 주장하며 정책을 만들어 간 것이 가장 잘한 일 같다.
초창기에는 장애인을 이용해서 정치를 하려고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이제는 장애인 총선연대, 장애인대선연대 등을 장애인계에서 자발적으로 만들며 장애인 유권자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질문: 지금은 장애인 운동의 정체기라 말한다. 동의하는가.
답변: 글쎄… 침체기라기보다는 새로운 운동 방식을 찾고 있다는 것이 더 옳다. 정보가 많아졌다. 그만큼 장애인복지의 스펙트럼이 커졌다. 따라서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초창기에는 요구가 단순하였다. 그래서 한목소리로 세를 보여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욕구가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 토론과 협력을 통해 우선순위를 정하고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질문: 장애인이 만족하는 사회가 가능하다고 보는가.
답변: 장애인뿐만이 아니라 여성, 청소년… 만족하겠는가? 보다 많은 사람에게 만족감을 주기 위해서는 균형을 맞춰 주는 것이 중요하다. 소외 계층을 끌어올려 주는 것 그래서 조화롭게 살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사회적 불만을 줄이고 행복한 사회를 가능하게 만든다고 본다.
질문: 이제 대선 정국인데 장애인계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전략을 갖고 있는가.
답변: 장애인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정부 때이다. 그때부터 활성화되어서 노무현 정부 때 이룸센터,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성과를 올렸다. 이명박 정부 때는 연금이 이루어졌고, 박근혜 정부는 「발달장애인지원법」이 제정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대선 공약이었다. 공약으로 확정이 되어야 우선 정책이 된다. 그런데 공약이 되어도 예산이 마련되지 않으면 시행에 어려움이 많다. 공약의 실효성을 담보받기 위해서는 예산 투쟁이 필요하다.
19대 대선 공약은 인상과 제정 수준이 아니라 장애인복지가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될 수 있는 세밀하고 차원 높은 새로운 공약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공약을 세팅하는 대통령인수위원회에서부터 장애인 공약 시행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질문: 장애인복지를 하려면 정치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동안은 장애인 정치인들이 그런 역할을 했지만 20대 국회는 그 창구가 막히지 않았는가.
답변: 20대 국회에서 장애인 비례대표를 배출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각 당에서 미안해한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의원은 장애인 부모이기 때문에 장애인문제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장애인복지 창구와 연결 역할을 하려고 한다.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인 더불어민주당 양승조 의원도 일주일에 한 번씩 회의를 갖자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다.
20대 국회 장애인 비례대표가 없어서 생긴 가장 큰 손실은 국회 안에 동료로서의 장애인이 없다는 사실이다. 장애라는 화두를 갖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장애인 비례대표는 장애인 손에 의해, 장애인의 검증을 거쳐 국회에 들어가야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질문: 장총을 비롯해서 연합기구가 많은데 보통 사람들은 장애인 연합기구가 하나인 줄 안다. 연합기구를 묶을 수 있는 방안은 없는지.
답변: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공무원의 분리주의로 채택된 것이다. 장애인끼리 싸움을 붙인 결과가 되었다. 사실 비장애인들은 장총이든 장총연이든 구별도 안 되고 관심도 없다. 만약 장총만 있었다면 더 발전했을까? 그렇지 않다. 자발적 분파가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장총, 장총련이 있었기에 각자 더 열심히 노력하며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본다.
장애인계 뿐만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사회는 체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하고 그러면서 교류 협력하는 단계로 성장을 한다. 장애인계 저변에는 장총, 장총연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정서가 있다. 그 뜻이 강하다면 하나가 될 것이다.
질문: 요즘 장애인문화예술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데 장애인복지에서는 장애인문화예술을 이방인처럼 보기도 한다. 장애인복지를 위해 장애인문화예술이 필요하지 않은가.
답변: 당연하다. 장애인들이 원하는 것은 장애인공화국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살자는 것이다. 비장애인과의 사회 통합에 장애인문화예술만큼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야가 없다.
질문: 개인적으로 어떤 분야에서 능력 발휘를 하고 싶은가.
답변: 장애인계를 떠나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장애인복지관 관장을 하고 싶다. 복지관에는 지역 장애인이 있고, 종사자가 있고, 예산도 있다. 장애인운동이 지역사회 중심으로 이뤄지면 훨씬 효과가 크다.
전국에 퍼져 있는 장애인복지관이 지역사회 장애인을 위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장애인 단체정신으로 지역사회를 조직화시킨다면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동안 장애인복지관이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험으로 장애인복지관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질문: 장애인계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장애인의 날 훈·포장에서 김 총장의 이름을 본 적이 없다. 서운하진 않은가.
답변: 상이 중요하겠는가? 이제는 “우리는 말이죠.”라고 장애인문제를 내 문제로 생각할 만큼 동화가 되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실례이지만 어디가 장애세요?”라고 묻는다.
비장애인이 장애인과 함께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장애인은 어떠냐?”고 장애인을 집단화해서 평가하려고 하는데 그것 역시 개선되어야 한다.
장애인 문제는 장애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이 장애인을 받아 주지 못하는 사회 구조의 문제인데 장애인계에 처음 들어올 때나 지금이나 아직도 그 사회구조적 문제에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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