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도 장애인식 변화 위해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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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3-22 09:06 조회1,28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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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도 장애인식 변화 위해 노력해야 한다
스스로를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지 말아야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17-03-21 14:02:18
나는 현재 시각장애를 가진 엄마들과 그 아이들로 구성된 자조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얼마 전 아이들과 함께하는 모임이 있어서 참석하게 되었는데 엄마 한분이 모임장소까지 찾아오는데 고생했다며 짜증내는 기사님한테 “못 보는 사람 불쌍하게 생각하시고 도와 달라”며 부탁까지 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짜증낸 기사님보다 자신을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어 구걸하듯 도움을 청한 것과, 그것을 무슨 모험담처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그 친구를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비장애인들 중에는 신체적으로 불편하고 생활이 용이하지 않은 우리를 불쌍하고 측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비장애인의 배려심도 어쩌면 이런 마음에서 발현된 온정주의적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동정심이나 측은지심이라도 어쨌든 배려 받고 도움 받을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결과만 따진다면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어째서 유독 비장애인의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도움에는 동정이나 측은지심이 깔려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왜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며 기꺼운 마음으로 감사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배려는 비단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관계에서만 행해지는 행동이 아니다. 배려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중요시되고 강조되는 도덕적 덕목이다.
가령 초보운전자나 깜박이를 켜고 끼어들려는 운전자를 위해 서행하며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도 배려이고 볼일이 너무너무 급해서 화장실에 갔는데 줄이 너무 길어서 안절부절 못할 때 순서를 양보하는 것도 배려이며, 양손 가득 짐을 들고 가는 이를 위해 문을 대신 열어주거나 닫히지 않도록 잡아주는 것도 배려이다.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할 때 상대를 불쌍하다거나 안됐다는 마음을 갖지는 않는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서로 상부상조하는 마음과 이타심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다.
즉 진정한 배려는 너와 나를 동등하고 대등한 관계로 보고 나나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를 위해 심적 물질적으로 상대를 위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를 불쌍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은 벌써 대등한 관계가 아닌 상하관계가 되는 것이다. 즉 상대가 나보다 불쌍하므로 내가 하는 행동은 베푸는 것이며, 그것을 감사해야한다는 마음을 담고 있게 된다.
몇 년 전 지하철 역사를 혼자 걷고 있는데 어떤 분이 도와주겠다며 다가온 적이 있었다. 충분히 혼자갈수 있는 길이어서 “고맙지만 괜찮다”며 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분은 억지로 내 팔을 부여잡으며 도와주겠다고 하셨다.
내가 강하게 거절하자 그분은 멀어져가며 들으라는 듯이 “불쌍해서 도와주려 했더니....” 하며 투덜거리셨다.
그분은 표면상으로는 나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보지 못하는 나를 동정하며 자신이 신체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으로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도우려던 것 뿐 이었다. 이런 비장애인의 일방적인 배려는 장애인들을 더 곤혹스럽게 하거나 모멸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과거 장애인 인권이나 장애인 복지가 제도화되기 전에는 많은 장애인들이 생계를 연명하기위해 스스로를 불쌍한 존재로 드러내고 비장애인으로 하여금 동정심과 측은지심으로 온정을 베풀어 주기만을 기다리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계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기본적인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없다.
즉 그 친구는 스스로 불쌍한 사람을 자처하며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것이다. 엄연히 택시비를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는 입장에서 도착지까지 안전하게 갈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 한마디로 자신의 권리를 기사님의 베풂으로 양도한 것이다.
더군다나 엄마와 동승한 어린아이들은 스스로를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엄마를 보며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불쌍한 엄마를 둔 자신들 역시 불쌍한 아이라고 생각하며 자존감에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까?
아이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세상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라는 울타리 속에서 내가 보호받고 있다는 안정감과 위로를 받고 엄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엄마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와 자존감을 쌓아가게 된다.
그 친구는 자신의 말 덕분에 무사히 잘 도착했다고 여겼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권리와 아이들의 자존감에 생채기를 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게 안타까웠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고 측은지심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행동 또한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도움을 주고 배려함에 있어서 상대의 인격이나 존엄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따뜻한 정을 주고받는 것이 온정주의이며 사회복지는 이러한 온정주의가 바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비장애인에게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벗고 바람직한 장애인식으로 배려하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스스로를 반성하고 의식을 변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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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이들과 함께하는 모임이 있어서 참석하게 되었는데 엄마 한분이 모임장소까지 찾아오는데 고생했다며 짜증내는 기사님한테 “못 보는 사람 불쌍하게 생각하시고 도와 달라”며 부탁까지 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짜증낸 기사님보다 자신을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어 구걸하듯 도움을 청한 것과, 그것을 무슨 모험담처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그 친구를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비장애인들 중에는 신체적으로 불편하고 생활이 용이하지 않은 우리를 불쌍하고 측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비장애인의 배려심도 어쩌면 이런 마음에서 발현된 온정주의적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동정심이나 측은지심이라도 어쨌든 배려 받고 도움 받을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결과만 따진다면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어째서 유독 비장애인의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도움에는 동정이나 측은지심이 깔려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왜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며 기꺼운 마음으로 감사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배려는 비단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관계에서만 행해지는 행동이 아니다. 배려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중요시되고 강조되는 도덕적 덕목이다.
가령 초보운전자나 깜박이를 켜고 끼어들려는 운전자를 위해 서행하며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도 배려이고 볼일이 너무너무 급해서 화장실에 갔는데 줄이 너무 길어서 안절부절 못할 때 순서를 양보하는 것도 배려이며, 양손 가득 짐을 들고 가는 이를 위해 문을 대신 열어주거나 닫히지 않도록 잡아주는 것도 배려이다.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할 때 상대를 불쌍하다거나 안됐다는 마음을 갖지는 않는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서로 상부상조하는 마음과 이타심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다.
즉 진정한 배려는 너와 나를 동등하고 대등한 관계로 보고 나나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를 위해 심적 물질적으로 상대를 위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를 불쌍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은 벌써 대등한 관계가 아닌 상하관계가 되는 것이다. 즉 상대가 나보다 불쌍하므로 내가 하는 행동은 베푸는 것이며, 그것을 감사해야한다는 마음을 담고 있게 된다.
몇 년 전 지하철 역사를 혼자 걷고 있는데 어떤 분이 도와주겠다며 다가온 적이 있었다. 충분히 혼자갈수 있는 길이어서 “고맙지만 괜찮다”며 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분은 억지로 내 팔을 부여잡으며 도와주겠다고 하셨다.
내가 강하게 거절하자 그분은 멀어져가며 들으라는 듯이 “불쌍해서 도와주려 했더니....” 하며 투덜거리셨다.
그분은 표면상으로는 나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보지 못하는 나를 동정하며 자신이 신체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으로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도우려던 것 뿐 이었다. 이런 비장애인의 일방적인 배려는 장애인들을 더 곤혹스럽게 하거나 모멸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과거 장애인 인권이나 장애인 복지가 제도화되기 전에는 많은 장애인들이 생계를 연명하기위해 스스로를 불쌍한 존재로 드러내고 비장애인으로 하여금 동정심과 측은지심으로 온정을 베풀어 주기만을 기다리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계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기본적인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없다.
즉 그 친구는 스스로 불쌍한 사람을 자처하며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것이다. 엄연히 택시비를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는 입장에서 도착지까지 안전하게 갈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 한마디로 자신의 권리를 기사님의 베풂으로 양도한 것이다.
더군다나 엄마와 동승한 어린아이들은 스스로를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엄마를 보며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불쌍한 엄마를 둔 자신들 역시 불쌍한 아이라고 생각하며 자존감에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까?
아이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세상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라는 울타리 속에서 내가 보호받고 있다는 안정감과 위로를 받고 엄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엄마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와 자존감을 쌓아가게 된다.
그 친구는 자신의 말 덕분에 무사히 잘 도착했다고 여겼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권리와 아이들의 자존감에 생채기를 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게 안타까웠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고 측은지심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행동 또한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도움을 주고 배려함에 있어서 상대의 인격이나 존엄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따뜻한 정을 주고받는 것이 온정주의이며 사회복지는 이러한 온정주의가 바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비장애인에게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벗고 바람직한 장애인식으로 배려하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스스로를 반성하고 의식을 변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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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김경미 (kkm75@kbuwe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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